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신영복 <담론> by 사막의별

누구나 고전을 말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것이 고전이다.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인문학사가 내게 주어진 것은 극심한 취업난이라는 생각에, 인문학을 공부하라 했던 선생님들이 한 때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과학자들에게 인문학적 사고를 가르치는 것이 인문학자에게 과학 기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쉽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인문대생들을 채용하여 기술을 교육하기 보다, 공대생들을 채용하여 그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고 하였다. 문과생이 이과 학문을 전공하는 데 진입장벽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크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인문학적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이 인문학적 사고 방식을 체득하는 것을 결코 문과생이 컴퓨터 공학을 배우는 것보다 쉽지 않을 것 같다. 시작은 쉬울 지 몰라도 정말 인문학적 사고를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 즉 체득은 훨씬 더 많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인문학은 처음에는 비교적 쉽다고 느껴진다. 복잡하고 어려운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예체능처럼 많은 연습이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 공부는 재미있다. 내 삶에 직접적인 적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들어 인문학 공부야 말로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어느 하나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하나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생각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부터, 그와 대립되는 생각은 또 어떤 것이 있나 보아야 한다. 

매우 존경하는 교수님 한 분께서 '학생다움'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물으신 적이 있다. 요즘 대학생들은 학생의 본분을 잊고, 스펙이니, 취업준비니,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하셨다. 학생이란 자고로 공부를 해야하는 존재인데, 막상 공부를 해야할 때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제서야 알 것 같다. 내가 왜 그때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후배들, 특히 신입생들에게 딱 한 가지 조언을 하라고 한다면 도서관에 자주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도서관에 가서 어떤 책이든 좋으니 닥치는 대로 많이 읽으라고. 고전이라 어려워 하지 말고, 과학이라 겁먹지 말고. 1장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다양한 분야의 책을 가능한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물론 20살 때 읽는 논어와 40에 읽는 논어의 깊이는 비교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논어를 읽은 20살과 그렇지 않은 20살의 지평의 차이 역시 무시할 수 없으리라. 

책을 읽는 이유는 많다. 논술 공부를 위해, 과제를 위해, 지식 습득을 위해, 간접 경험을 위해. 나는 인생 공부를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으로부터 얻는 지식은 한정적임이 분명하다.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얻는 지혜는 그 어떤 훌륭한 책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론적 바탕은 그 경험으로부터 얻는 가치를 배로 늘려 줄 수 있고, 힘들 때 위로가 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소위 말하는 '힐링' 도서들이 베스트셀러를 점령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책들은 일시적 마취제처럼 공허하고 다소 얄팍한 느낌이다. 잠깐의 위로는 되지만, 치유는 되지 않는 기분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담론>은 고전들의 묵직함을 바탕으로 진심어린 충고를 준다.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혀줌은 물론, 이 험난한 세상을 '포용하는 능력'까지. 모두가 아프다고 해서 아픔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해야 견딜 수 있을지, 개선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성찰하게 해준다.  이제는 절대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신영복 선생님은 참으로 따뜻하신 분이 아니었을까.  

학생이라면 공부를 해야한다던, 학생다움을 조금 더 누리면 좋겠다던, 그 교수님은 잘 계실까.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하는지 이제서야 알 것 같은데,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조언을 이제서야 이해한 것 같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다.

총   평: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몇 달에 걸쳐 읽었고, 고백하자면 읽다 잠든 적도 몇 번 있다. 그럼에도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상황을 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강의 녹취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보다 더 편하게 읽히며, 책을 읽으면서도 선생님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쉬웠던 점은 고전의 원문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따로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고전을 주로 다룬 1부와 신영복 선생님의 개인적 이야기를 주로 다룬 2부로 나눌 수 있는데, 2부가 확실히 더 가볍게 읽히지만, 1부 내용은 어려운 만큼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라도 꼭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기억에 남는 부분들 발췌: 

20) 우리는 생각이 머리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전두엽의 변연계에서 형성되는 이미지를 생각이라고 한담녀 그렇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잊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어머니가 떠나간 자녀를 잊지 못하는 마음이 생각입니다. 생각은 가슴이 합니다. 생각은 가슴으로 그것을 포용하는 것이며, 관점을 달리한다면 내가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입니다.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애정과 공감입니다. 

52-53) 추상은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압축하는 것이고, 상상력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 추상력과 나란히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작은 것, 사소한 문제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빙산의 몸체를 볼 수 있는 상상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 사소한 것이란 없습니다. 다만 사소하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사소한 문제라고 방치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 중요한 것은 추상력과 상상력 하나하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적절히 배합하여 구사할 수 있는 유연합니다. 그런 공부가 쉬운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품성의 문제입니다. 생각하면 시적 관점과 시적 상상력이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86) 관용에서 유목으로 탈주하는 탈근대의 경로이기도 합니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관념은 경제주의적 발상이고 근본적은 동의 논리입니다. 열린 사고가 못됩니다. 통일은 민족의 비원입니다. 눈물겨운 화해이면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가슴 벅찬 출발입니다. 통일을 대박으로 사고하는 정서가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대박처럼 갑자기 다가올 때가 오히려 파탄이고 충격입니다. 남과 북은 다같이 높은 교육 수준의 인력을 갖고 있습니다. 차세대 기술과 막대한 부존자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냉정히 통찰해야 합니다. 

147) 우리 사회의 열악한 노동 현실 때문에 노동에 대한 관념이 부정적입니다만 사실은 노동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노동은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첫 시간에 공부는 달팽이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은 노동합니다. 한 송이 코스모스만 하더라도 어두운 땅속에서 뿌리를 뻗고 계속해서 물을 길어 올리는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 참새인들 다르지 않습니다. 노동은 생명이 세상에 존재하는 형식입니다. 그것을 기계에게 맡겨 놓고 그것으로부터 내가 면제된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계의 효율을 통하여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여가를 즐기게 된다면 그것으로써 사람다움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노동 경감과 소비 증대가 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 자체를 인간화하고 예술화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251) 영화의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엑스트라와 주인공의 차이는 외모의 차이가 아닙니다. 엑스트라와 주인공의 결정적인 차이는 주인공은 죽을 때 말을 많이 하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엑스트라는 금방 죽습니다. 주인공에게는 친구도 있고, 애인도 있고, 가족도 있습니다. 죽을 때 그 사람들에게 말을 남깁니다. 엑스트라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죽습니다. 누구든지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면 빛납니다. 

252-253) 미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입니다. 미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은 미가 바로 각성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각성하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고 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술회합니다.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얇은 옷을 입은 사람이 겨울 추위를 정직하게 만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한매, 늦가을 서리 맞으며 피는 황국을 기리는 문화가 바로 비극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화입니다. 우리가 비극에 공감하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세상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290) 자부심은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 물질적 도움보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326)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세심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불가피했던 수많은 이유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춘풍처럼 관대합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이란 금언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관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자기 사정 늘어놓는 사람치고 썩 좋은 사람 별로 없습니다. 자기변명 없이 욕먹으면서도 침묵하는 사람 중에 좋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359) 에피쿠로스의 도표에 의하면 행복과 소비는 비례하지 않습니다. 소비가 아무리 증가하더라도 행복은 증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경제원칙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최대의 희생으로 최소의 효과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입니다. 고뇌와 방황과 좌절이 인간을 얼마나 성숙하게 하는지에 대하여 경제원칙은 무지합니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구호도 비인간의 극치입니다. 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최대의 소비는 전쟁입니다. 전쟁이야말로 미덕이 된다는 역설입니다. 지금 그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425)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이라고 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였습니다. 햇볕이 '죽지 않은' 이유 였다면, 깨달음과 공부는 '살아가는' 이유였습니다. 여러분의 여정에 햇볕과 함께 끊임없는 성찰이 함께하기를 빕니다.   

영화같은 현실, 현실같은 영화. <빅쇼트> by 사막의별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을 정도로 1930년대 미국 대공황과 견줄만한 사건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경험해도 되는 가 싶을 정도로 세계는 조용한 날이 없는 것 같다. 미국의 패권 하에 경제 호황이 지속되면서 인류 평화 시대가 도래하는 가 싶더니, 9.11 테러가 터지고, 미국 자본 시장이 뒤흔들렸다. 우리는 아직도 이 두 사건의 뿌리 깊은 영향 속에 살고 있지만, 세계 금융위기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한국 증권 시장도 보기가 어려운데, 세계 금융 시장이라니. 

2014년 크림반도 사태가 일어났을 때, 우리가 정세를 읽어야 하는 이유로 국제 시장의 유기적 연결망을 설명해주신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와 다소 상관없는 국제 분쟁이라 생각할지여도, 크림반도 불안정화는 일시적 국제 유가 상승을 야기하여, 한국의 GDP 감소와 물가 상승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관계는 이보다 더 복잡하게 섥혀 있다. 미국 경제가 재채기을 하면 한국 경제는 몸살로 앓아 누을 수 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발 금융위기는 다소 어려운 이야기에도 꼭 알아야 하는 이야기이다. 사실, 미국발 금융 위기 자체가 대중들의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아담 맥케이 감독의 <빅 쇼트 (The Big Short)>이다.  

물론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붕괴 자체는 일부 돈에 눈이 먼 금융권 종사자들의 악행으로 인한 것이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동안의 저축을 한 순간에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일반 시민들이, 혹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돈을 맡겨둔 은행들과 금융 상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살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텐데. 

영화 이야기를 하자면, 재미있게 멍 때리면서 볼 수 있는 오락용 영화는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그렇게 악평을 받을 정도로 지루한 영화는 아니다. (이보다 훨씬 더 지루한 B급 오락 영화도 많다.) 영화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영화의 큰 주제인 금융 상품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영화에서 친절히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리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시사 문제에 대한 관심이다. 

영화를 비롯하여 소설, 드라마, 수필, 만화 등, '이야기'의 힘은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특히 영화를 보면서 나는 우리가 주인공들과 공감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세상의 부분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좋다. 

<빅 쇼트>를 보면서 미국 월스트리트 시위가 왜 일어났는지, 왜 그들이 분노하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였다. 이 세상이 얼마나 불합리적이고 철저히 자본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인지 다시 한 번 보았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빅 쇼트>는 월스트리트 금융권이 온갖 허황된 파생상품 쓰레기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몇 명의 사람들이 이 기회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는 내용다. 왜 2008년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터질 수밖에 없었는지 간단한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금융권의 비리와 더러운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는 사실 처음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울프 오브 더 월 스트리트>도 비슷한 비판 의식을 제기하고 있지만, <빅 쇼트>가 조금 더 무겁고, 느린 버젼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빅 쇼트>에는 우리가 깊이 공감하고 응원하고 싶은 '영웅'도, 마구 비난하고 저주하고 싶은 '악당'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을 바탕으로 했음을 극 중에서도 계속해서 강조하는 <빅 쇼트>가 정말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그렇지 않을까. 시스템 자체가 썪었다면, 그 시스템을 악용하는 자들은 영웅인가 아니면 또 다른 악당인가. 2008년 금융위기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몰았지만 소수의 몇 사람들은 순식간에 억만장자로 만들었다. 그들은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는 제한된 러닝 타임 속에 시작과 끝이 있지만,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다.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고 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영화에나 나올법한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내가 그들이었다면,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볼 때라고 생각한다.  

[주절주절 감상평] 비슷한 나를 사랑하니? <더 랍스터> by 사막의별

진부한 사랑 영화는 많다. 서로의 짝을 찾기 위한 서바이벌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설정을 듣고, 신선하다 생각하였다. 그리고 포스터에 반했다. 영화 <더 랍스터>이다. 

"What animal will you be?" 

매치 메이킹에 실패한 사람들은 동물로 전환된다. 그에 대한 답으로 데이비드는 랍스터가 되고 싶다 한다. 흔하지 않은 동물이며, 오래 산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다시 태어난다면 독일 중산층의 집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는 그가 떠올랐다. 고뇌하고 힘들어하는 인간보다는 자기가 동물이라는 것조차 어쩌면 자각할 수 없는 동물의 처지가 더 나은 것 아닐까. 나 역시 다시 태어나면 누군가 내 인생을 완전히 보살펴 주는 안락한 집의 애완동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고양이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굳이 선택을 하라 한다면 나는 인간임을 포기할 수 있을까?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을 샜다. <더 랍스터>는 사랑에 대한 영화이다. 솔로들에게는 45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지고, 한정된 집단 안에서 자신과 큰 특징을 공유하는 '완벽한 짝'을 만나야 한다. 공통된 특징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커플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이 영화는 내 이목을 휘어잡았다. 

우리는 과연 닮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물론 내가 완전히 좋지도, 싫지도 않다.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는 장단점을 두루 갖고 있다. 예민하다면 단점이고, 섬세하다면 장점이다. 즉흥적이라면 장점이고, 계획없이 산다면 단점이다. 우리 모두는 양면성을 갖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이 타인이 생각하기에는 나의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나의 특징을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극명할 수도 있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질까?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늘 그 이유가 궁금하다. 대체 왜? 이는 내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의 어떤 면이 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는 지에 대한 단순한 궁금증이다. 그 이유를 알아야 설령 내가 변한다하더라도 그 특징은 남겨둘 수 있을 것 아닌가. 

<더 랍스터>에서 사랑의 조건은 간단했다. 공통된 특징을 가질 것. 아무 때나 뜬금없이 코피가 나는 두 남녀가 있다면 그들은 완벽한 커플을 이룰 수 있다! 둘 간 마찰이 생겨도, 아이를 배정해주면 서로는 맞춰 나갈 것이라는 가정도 주목 할만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는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취향과 취미를 공유한다는 것은 물론 감사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같은 취향과 취미를 가진 사람에게 끌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비슷한 사고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화하기도 편해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데 있어 더 쉽다는 점도 타당하다. 그럼에도 자석의 양쪽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나와는 너무나 다른 그에게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통점이 단 하나도 없으면 문제이겠지만, 너무 닮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결코 좋지 않은 것 같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유전자의 다양함을 위해 나와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미래에 어떤 형질이 생존에 더 우월할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니까 최대한 유전자 풀을 다양화 시켜 생존 확률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진화 과정의 핵심이었으니까.

미드 닥터 하우스를 보면 자기와 모든 점에서 동의하고 비슷한 의견을 개진한 의사를 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자기가 이미 다 아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몇 십 년만에 만났다면, 서로 다른 것이 더 당연한 일이다. 두 사람의 모든 취향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면, 한 쪽은 인위적으로 맞춰주고 있는 가능성이 높다. 설령 두 사람의 취향이 기적적으로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새로움에 대한 이끌림은 우리의 본성 중 하나인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는 관계가 더욱 재미있다.  


"우리가 헤어진다면 너무 비슷해서이기 때문일꺼야".

그와 나는 정말 닮았었다. 성격도, 취향도, 취미도, 성향도. 요리보다 설거지를 싫어하는 것도, 비빔밥에 고추장을 넣지 않고 먹는 것도. 처음에는 그 비슷함에 끌렸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와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그 사실에 매료되었다. 말이 너무 잘 통했기에 처음에는 사소한 '차이'는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초반에 그렇게 두드려졌던 '닮음'이 하나씩 깨어졌고 (앞서 말했지만 몇 십년 간 따로 산 두 사람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필연적인 과정이었음에도), 그때마다 관계에 대한 확신도 없어졌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도, 그에 대한 반응은 또 너무 비슷했다. 그는 자존심을 지키길 원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침묵했고, 그 역시 침묵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어떤 마음일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그와 나는 너무 비슷했기에.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모순적이지만, 우리는 너무 비슷하지만 달라서 결국 헤어졌다. 


진부하지만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서로 공유하는 지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의 다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소통이다. 그리고 비슷함은 때로는 그에 대한 장벽이 될 수도 있다. 

<더 랍스터>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저렇게까지 치열하게 완벽한 짝을 찾아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공통된 특징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생존을 위해서라면 서로 최소한의 합의만 이뤄진다면 그 누군가를 만나도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닐까. 인간임을 포기할 정도로 완벽한 짝을 찾는 것이 생의 중요한 목표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서로에게 사랑한다 말하지만, 과연 사랑을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나와 상대방 중 한 명이 죽어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까. 시력을 잃어야 한다면? 동화 속 사랑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예전에는 영화에서라도 그 존재를 얼핏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보는 영화에서조차 우울한 사랑이다. 

문득 봄이 기다려지는 겨울 날이다. 


발렌타인을 맞이하여 쓰는 사랑에 대한 단상 by 사막의별

Too much love will kill you.

사랑이라는 주제만큼 진부한 주제가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사랑에 대해 말한다. 영화관에서는 늘 최소한 한 편 이상의 로맨스 영화를 상영해주고 있고, 누군가의 노래처럼 카페에만 가면 들려오는 것이 사랑 노래다. 인종, 국적, 나이, 성별 모든 것을 뛰어넘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면 사랑이다. 

나는 독신주의자도, 자유연애주의자도 아니다. 하지만 낭만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그래서일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사랑인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서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 해서 이뤄지지도 아닌 것.

연애에 대한 나의 가치관은 참으로 다양한 방식들로 형성된 것 같다. 유년기의 디즈니 공주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순정만화, 인터넷 소설을 거쳐, 셀 수 없는 헐리우드 로맨틱 코미디까지. 

무럭무럭 자라난 내 로망과 환상은 내 실제 연애들로 인해 무참히 깨져버렸다. 

하나씩 낭만을 포기하게 되고, 기대를 애초부터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변하는 것일까. 그 어떤 누구에게도 마음을 온전히 열지도, 주지도 않는 것이야말로 나를 완벽히 지키는 방법이라 믿게 된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그럼에도 매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 나는 바보인가보다. 

단 한 번도 결혼이 내 인생 목표였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아마 올라가는 나이 때문이리라) 주변 들어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부쩍 자주 듣고 있다. 선이라든지, 커플 매칭 업체라든지, 취집이라든지. 그들이 경멸조로 자조적 농담을 하는 것이라 해도 농담 속 뼈가 있다는데. 벌써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하는데 내가 정말 소위 말하는 결혼 적령기를 넘기는 날에는 한국을 떠야할지도 모르겠다.

발렌타인 데이를 맞이하여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나는 발렌타인 데이가 싫다. 지나치게 상업적인 것도 싫고, 왜 이 날만 특별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커플일 때는 어디까지 챙겨줘야 하는지 고민이라 싫고 솔로일 때는 나 빼고 모두가 행복한 것 같아서 싫다. 

커플 솔로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을 귀찮게 만들고 또 다른 사소한 분쟁거리만 더해주는 성가신 기념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 날을 특별히 여긴다. 어쩌면 그만큼 우리는 사랑에 목말라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발렌타인에 대한 나의 냉소적인 시선조차 사실은 부러움과 지난 날의 아련한 추억에 대한 미련일 수도 있을테지. 

사랑의 근본적인 어려움은 불완전한 의사소통에 있다. 우리는 타인이 말하지 않는 것은 모르고, 그 또는 그녀가 과연 진실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즉,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서로의 사랑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 진심이라 하더라도 그가 말하는 A와 그녀가 말하는 A가 같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내가 100을 느껴야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는 10을 느껴도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늘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호의가, 나의 마음이 어떤 이에게는 부담이었나 보다. 내가 어떤 대가를, 호혜적인 보상을 바랐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한 두 번 나의 진심이, 나의 마음이 무참히 버려지는 일을 겪다 보니, 이제는 마음을 애초에 주는 방법부터 잊어버린 듯하다. 어쩌면 그 중 일부는 산산조각이 나며 영영 없어져 버렸을 수도. 

이제는 아주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가끔 생각나는 기억들이 있다. 서로가 서로의 처음이었던 우리. 뭐가 그리 설레고 좋았었는지. 그가 그립지는 않다. 하지만 온 우주가 우리 둘만을 위해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때의 순수함이, 내 마음 모두를 딱 한 사람에게만 받혔던 그날의 내가 그립다.

20160211 지하철 잡념 by 사막의별

칭얼거리는 유치원생,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수험생, 화장으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다크서클이 진한 회사원, 술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중년 남성.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참으로 좁은 공간에 공존하게 되는 곳. 서울의 지하철이다.

이곳에서는 절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같은 공기를 공유하게 된다. 지상으로 달리는 몇몇 구간을 제외하고는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아 시간의 의미도 퇴색된다. 출퇴근 시간이라도 되면, 낯선 이들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늘 정도로 지나치게 밀착된 상태를 버텨야 한다.

나는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타거나 걷는 것이 훨씬 좋다. 그래도 서울에서 가장 빠르고 편리한 교통 수단을 꼽으라면 지하철이라 답할 것이다. 택시와 자가용은 편하지만 교통 체증을 피할 수 없고, 각 정류장마다 친절히 역 이름을 안내해주고 출구 정보가 명확해서 외국인들도 (나름) 쉽게 사용할 수 있다.

뜬금없이 왜 지하철 이야기냐고?

하루에 두 번, 26분씩. 일주일에 최소 12번. 대략잡아 계산해보면 나는 하루의 1/4 정도를 달리는 지하철에서 보낸다. 하루의 시작도, 하루의 마무리도 2호선 제일 마지막 칸에서 일어나는 셈이다.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만 잘 활용해도 반나절을 얻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지하철에서는 생산적인 일을 꾸준히 하기는 불가능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것도 아니고, 그냥 불가능이다.)

프랑스에서였다. 파리의 지하철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잘 연결시켜주고, 역사 깊은 도시의 자랑 중 하나지만, 결코 청결하다거나 유쾌한 공간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서울 지하철에 늘 감사하다.) 에어컨과 난방도 잘 안 되는 열차 안 공기는 온갖 사람들의 땀냄새와 지하 터널의 먼지로 가득하다. 심지어 엄청 덜컹거리고 시끄럽기까지! 그런 곳에서 손바닥만한 노트에 빼곡히 필기체로 한 줄 한 줄 써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주위 사람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열중해서 자신의 글을 써나가고 있었고, 그런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는 어떤 글을 쓰고 있었을까.

그 이후 나도 종종 지하철에서 글을 쓴다. 폰으로 노트를 남기거나 블로그 초안을 쓸 때도 있지만, 때로는 펜과 작은 수첩을 꺼내 90년대에서 시간 이동을 한 사람 마냥 끄적이고 있으면 힐끗거리는 옆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수도 있다. (사실 이 글의 초안도 달리는 2호선 안에서 작성되었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은 한 여성은 대놓고 내 글을 감상하시어 최초의 오프라인 독자와의 만남을 갖게 된 기분을 선사해 주셨다.)

그래도 내가 지하철에서 하기 가장 좋아하는 일은 사람구경이다. 지하철에서 나는 주로 따뜻한 침대에서 미처 채우지 못한 수면 시간을 조금이나마 늘리기 위해 비몽사몽인 상태이거나 폰 속 세상에 빠져있기에 주위를 둘러 볼 겨를이 크지 않다. 그럼에도 가끔 고개를 들어 같은 공간 속 똑같이 덜컹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다양한 사람들이, 참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밤 11시. 무거운 가방과 더 무거운 눈꺼풀을 견디며 탄 지하철. 그곳에서 나는 작은 세상을 보았다.



그의 말 by 사막의별

나는 너가 대중적인 글을 쓰면 좋겠어.

그가 말했다.

대중적인 글? 내가 왜 남의 취향 따위를 고려해야 하지? 내 글인데!

나는 내 글을 누가 읽든 신경쓰지 않아. 내 글이 싫은 사람은 읽지 않아도 돼.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래. 그걸로도 난 충분히 만족해.

나는 거짓말쟁이었다. 만족은 무슨. 아무도 읽지 않아도 되는 글이라몀 굳이 인터넷에 공개로 올릴 필요가 있겠는가. 비공개 다이어리 앱도 수십 개인 요즘인데.

문제는 무엇이 대중적인지 나는 도통 알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대중적인 글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이 아닐까. 충분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면서도 계속해서 읽을 정도로 식상하지 않은 글.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사진을 찍어 공유하며 심지어는 동영상도 제작하는 오늘날 '대중적인 글'을 쓰라니.

그에게는 남다른 시각과 감각이 있었다. 스스로도 말했지만 그는 소위 어떤 것이 '먹히는' 아이디어인지 보는 눈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가장 대중적이고 평균적인 취미판단 기준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기준이 아니라, 나는 취향이 독특하다. 음악 플레이리스트에는 단 한 곡의 아이돌 노래도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마 들어보지조차 못한 인디 밴드들의 노래가 가득하다. 영화 선택도 흘러넘치는 상업 영화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보다는 일주일에 두 세 번 상영할까 말까하는 소수취향의 독립 예술 영화라 불리는 것들을 선호한다. 베스트셀러는 그 유명세에 읽어보긴 하지만 늘 실망해서 도서관 한 코너에서 방치된 책을 찾는 재미를 즐기고, 예능 프로그램은 끊은지 오래다.

나의 독특한 취향은 내 자부심이기도 했다. 내 취향이야말로 내 정체성이라고 생각했기에. (입맛처럼 내 문화적 취향 역시 하루아침에 생긴 것들이 아니고 수많은 사연과 시간의 축적이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할 필요도 없고 사실.)

그와 함께 했을 때는 너무나 대중적이다 못해 식상한 한국 상업 영화들을 보고, 멜론 인기차트 100순위를 그대로 다운받은 듯한 그의 선곡리스트에서도 나름 마음에 드는 노래들을 발견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의 취향에 맞춰주기 위해 (혹은 그로부터 또 다른 핀잔을 듣지 않기 위해)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와 주요 포털의 메인 페이지, 그리고 별 실없는 글들을 먹여주는 앱들도 종종 의식적으로 챙겨보기 시작했다.

그런 영화들이, 음악들이, 실없는 이야기들이 익숙해져가기 시작할 때쯤 그와 헤어졌다.

나는 다시 편식을 시직했고 그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은 모두 의식적으로 배척했다.

그런데도 한 가지 말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너가 대중적인 글을 썼으면 좋겠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잘 생각해보라고,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신경쓰지 말고 원하는 일을 해보라는 말을 해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항상 글을 쓰고 싶었다고, 앞으로도 글로 인정받고 싶다고, 나 스스로에게도 인정하지 못했던 욕구를 털어놓자 그가 해준 말이었다. 혼자만을 위한 글을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글이면 더 좋지 않겠니?

이제는 더이상 그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지만, 한 번은 시도해 볼만 한 일인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열심히 하는 일. 그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던 이유도 바로 그거였으니까.

엄청난 주제 의식이 있는 것도, 공유할 지식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냥 누군가에 의해 읽혀지고 싶은 작은 소망이다.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가장 멀고, 어쩌면 공감 글쓰기 작가가 되기에는 가장 비적합할 수도 있는 나이기에, 아무에게도 읽히지 못한 채 온라인 어딘가에서 영원히 묵혀있게 될 가능성이 더 높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학문 통합, 그 어려움에 대하여 - 도정일, 최재천 <대담> by 사막의별

요즘은 좀 덜 하지만,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학문의 통합' 및 융합이 한창 열풍을 일으켰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대놓고 이과를 선호하는 것 같지만, 지나치게 분절적인 분과확문 체계를 뛰어넘고자 한 노력은 대학마다 '자유전공학부'의 설립과 각종 '융합전공'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서점가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을 주제로 한 책들이 넘쳐 났는데, 아마 그 시초가 <대담>이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대화체로 쓰인 책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최재천과 도정일의 대화로만 구성된 이 책을 읽기란 너무 힘들었다. 뚜렷한 주제가 있다기 보다,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야 해서 읽으면서도 정리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래도 관통하는 책의 핵심 주제를 딱 하나만 뽑으라 한다면 '유전자'라 생각한다. 몇년 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는데, 비슷한 내용이 인문학자와 생물학자의 시각으로 풀어 설명되어 있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을 때도 했던 생각이지만, 과연 우리 모두가 번식을 목표로하는 유전자의 수단일 뿐이라면, 지금 자연은 '인간'이라는 개체를 말종시키고 생태게 그 자체를 위한 일종의 삭감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가족을 꾸리는 것을 포기한 채, 나홀로 족이 되려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은 꽤나 민감한 주제이고, 어려운 주제이다. 조금만 잘못 해석하여도 우생학이나 사회진화론처럼 인종차별주의적이고 위험한 이론들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객관성이라는 가치가 도덕적 타당성을 내포하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과 과학의 만남은 조심스럽게 중재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앞서 이과 선호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지만, 요즘은 과학에 대한 맹신이 중세 시대 기독교에 대한 맹신 못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위험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인문학과 과학 모두 중요하다는 생각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순수과학을 했거나, 인문학을 했다면, 한 쪽을 더 치우쳐서 선호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각각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대표하고 있는 두 분은 서로의 학문에 대해 아주 신사적인 태도로 고유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있다. 아, 중간에 사회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언급되오 있는데, 요지는 우리나라 사회과학은 너무 '과학적'인 척을 하려다보니 인문학적 깊이가 없다는 비판과 함께, 생물학 등 순수과학 하에 연구될 부분은 그쪽으로 넘어갈 것이므로, 사회과학의 미래를 상당 어둡게 그리고 있었다. 사회과학이야말로 순수과학과 인문학 두 가지를 모두 필요로 하는 학문인데, 참 어렵다. 


한 분야에 대해서 전문가가 되는 것도 어려운데, 학문의 통합 및 융합은 그에 비해 배로, 아니 제곱으로 어렵다. 깊고 넓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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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기억에 남았던 부분 발췌 :


165) “인간이 계획하면 신이 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인간의 겸손을 위해서는 늘 기억할 만한 말이죠물론 이때의 신은 섭리의 신이 아니라 우연의 신입니다나는 우연성의 신을 부정하지 않아요언제 그 신을 우연히 만나면 꼭 술 한잔 나누고 싶어요나는 우연의 창조성도 인정합니다그러나 우연의 신이 웃든 말든 인간은 죽자사자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그 실현을 추구합니다내 생각에는 우연성이라는 게 인간 존재의 조건이자 운명적 저주 같아요왜 계획하는가부족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역사에는 우연성이 무수히 끼어들지만 역사가 우연의 연속만은 아니죠그래서 나는 생물학 혹은 진화론의 우연성 주장을 사회에 곧장 적용해서 일종의 사회철학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미시세계에 대한 물리학의 불학실성이론 같은 것을 곧바로 인간사회에 적용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진화론이 사회이론이나 인문학에 유용한 통찰을 제공하긴 하지만인문 사회과학과 생물학 사이에는 진화론으로는 극복되기 어려운 고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도정일)

 

168) “공학적 유토피아는 모든 결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제시합니다그 유토피아의 그림은 너무도 매혹적이에요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제안한 궁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라는 개념은 시만의 권리 속에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권리 외에 사회적 경제적 권리까지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죠인권 개념의 역사에서 보면 그 제안은 상당히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그런데 이제 결함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defect’라는 것이 대두할지 모릅니다궁핍으로부터의 자유가 사회적 기획이라면 결함으로부터의 자유는 훨씬 개인적인 생명공학적 기획입니다. “내가 나를 뜯어고치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내가 천재 아들을 낳고 싶다는데 당신이 왜 참견이야?” 이런 개인 자유론이 사회 전반의 지배적 에토스가 되는 거죠그런데 가만있자그 자유가 왜 문제지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개개인이 훨씬 완전해지고 자기 운명을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나쁠 게 없잖아이거 좀 생각해봐야 하지 않아요? (도정일)

 

193)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합리성이나 과학성이 차고 넘쳐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많이 모자라서 문제입니다내가 보기에 한국인은 대체로 그 의식과 태도가 쪼개져 있습니다저는 이 분열상을 어떤 칼럼에서 두 개의 다른 시간대를 가리키는 시계로 비유한 적이 있어요한국인은 두 개의 시계를 차고 있다하나는 전근대의 시간에 멈추어선 왕조의 시계이고다른 하나는 무섭게 내달리는 현대의 시계다어떤 때는 왕조의 시계에 맞춰 행동하고 어떤 때는 현대의 시계에 맞춰 행동한다뭐 그런 이야기였어요그런데 그 두 시계 어느 쪽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죠지금 우리 사회는 고도의 경쟁주의 사회지만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파벌학벌연줄서열신분 같은 전근대적 비효율의 요인들이 선의의 사회적 경쟁력을 다 갉아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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